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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国的建国神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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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국신화의 내용과 주제

고대문학이 시작된 명백한 증거는 건국신화가 나타난 것이다. 위대한 영웅인 건국의 시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창업의 과정을 서술하고 칭송하는 신화는 고대에 이르러서 생겨났다. 국가가 생겨난 시기는 고고학의 시대구분을 따르면 청동기시대이다. 청동제 무기를 든 정복자들이 자기집단 안에서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가지는 사회구조를 이룩하고 밖으로 다른 집단을 쳐서 복속시키는 단계에 이르러,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출현하고 각기 나라를 높이건 국건신화를 만들어냈다.

건국신화는 거인신화, 지모신신화, 창세신화 등의 원시신화와 많이 달랐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남성이 하늘에서 부여한 권능을 실현해 나라를 세운 위업을 칭송하는 기본 설정에서 계급이 분화되고 역사가 시작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대부분 문헌에 기록된 형대로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기록된 신화는 거의 건국신화이다. 다음에 한국의 왕조 순서에 따라 다른 건국신화를 소개하겠습니다.

1.고조선 단국의 건국신화

<삼국유사> 서두에 고조선 건국신화가 전한다. 그 것이 최초의 건국신화이다. 이 시기에서 등장인물을 보면 환인(桓因)· 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대기이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인간세계를 다스리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 환인이 인간세계를 굽어보니 삼위태백(三危太伯)이 인간을 유익하게 하기(弘益人間)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지므로,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며 환웅으로 하여금 그곳으로 가 인간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자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비롯한 3,000명의 수하를 이끌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칭하며 다스리니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렸다. 그는 곡(穀, 곡식), 명(命, 목숨), 병(病, 질병), 형(刑, 징벌), 선함(善), 악함(惡) 등 360가지 일을 맡아 인간세계를 다스렸다.

그러자 같은 동굴에 사는 곰과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늘 간청해왔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神靈)한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며 이것만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은 인내하고 근신하여 삼칠일(3×7, 21일) 만에 인간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하는 사람이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환웅에게 아이 갖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왕검은 당고(唐高, 당고는 요임금을 말함) 즉위 50년 후인 경인년(요임금이 즉위한 때는 무진년으로 그 50년 후는 정사년임. 따라서 기록의 오류로 보임)에 평양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훗날 도읍지를 백악산〔白岳山, 또는 궁홀산(弓忽山),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함〕 아래 아사달로 옮겼다. 단군은 이후 1,500년간 조선을 다스리고 주나라 무왕(武王, 삼국유사에는 고려 혜종의 이름인 武 대신 虎로 표기됨) 즉위년에 기자를 조선 왕으로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뒷날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그때 단군의 나이 1,908세였다.

단군 신화는 간단히 말해 천신이 나라를 세우고, 그 왕위가 이어져갔다는 것이다.

이는 앙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 따르면, 천신의 자손인 현왕(現王)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영계(靈界)와 인간계(人間界)를 매개할 수 있는 샤먼(shaman)과 같은 특이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 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은 다음 시기인 삼국시대에도 이어졌다. 천신의 자손이 강림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신화는 동북아시아 지역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 흔히 보인다. 또한, 자신의 조상이 곰이었다고 하는 전승과 곰 숭배 신앙은 시베리아 퉁구스(Tungus)족의 여러 종족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고대문화의 기저에는 시베리아 지역 주민들의 문화와 연결되는 면이 존재함을 재확인할 수 있다.

단군 신화는 이를 통해 고조선인의 의식세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 외에, 그것이 후대인들에 의해 시기마다 새롭게 재해석되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12세기 후반 장기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 이후, 단군은 한국사의 독자성과 유구성 및 한국인 동질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2. 북부여 해모수의 건국신화

고조선 다음 순서로 등장한 나라는 부여(夫餘)이다. 기원전 3세기의 중국문헌에 이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그보다 앞서 건국되었던 것 같다. 북부여, 동부여, 존본(卒本)부여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그 뒤를 이었다. 그 여러 갈래 가운데 북부여가 근간을 이루어, 부여의 사회나 문화에 관한 자료가 대체로 북부여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천제의 명령에 따라 서기전 58년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웅심산(熊心山) 부근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하백(河伯)의 맏딸 유화(柳花)를 발견하고 유인하여 관계를 맺었고, 이어 하백을 찾아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입증함으로써 정식으로 유화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딸을 버릴까 두려워한 나머지 옳지 못한 행동을 한 하백의 처사에 분개하여 유화를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뒤 유화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한편, 그는 천제로서 직접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는 곳으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으며 부루(扶婁)를 낳았다는 전승도 있다.

3. 동부여 해부루의 건국신화

동부여 왕 해부루(解夫屢)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천제를 올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고

말했다. 이가 곧 금와이다. [금와란, 금개구리로서 개구리는 고구리로부터 기인된 말로 보인다. 북방어에 알틴, 알탄, 알지, 알신 등이 한자로 금(金)으로 표기된다.] 훗날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창건한 후, 해부루는 도읍을 옮겼으며, 이후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얼마 후,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가 바로 유화부인이다. 해모수와 강제로 잠자리를 함께 한 유화부인은 부모에게 버려져 그곳에 있었는데, 금와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궁으로 맞아들였다. 이후 유화부인이 알을 하나 낳았고, 이 알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주몽이다.

4.고구려 주몽의 건국신화

주몽은 하백의 딸 유화와 해모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유화는 허락없이 외간 남자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쫒겨났다. 그 모습을 본 금와왕은 유화를 거두는데 며칠후 유화는 알을 낳는다. 그래서 금와왕은 돼지에게도 주고 새에게도 주는데 모두 알을 품어주었다. 어쩔수없이 유화 부인에게 돌려 준다.며칠후 아이가 깨어나는데 이가 주몽이다. 주몽은 금와왕의 왕자들과는 활쏘기면 활쏘기 글공부면 글공부 뒤떨어지는 게 없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대소왕자는 주몽을 쫒는데 주몽은 도망가다 엄호수와 맞닥들이게 된다. 주몽은 나는 천체의 자손이다. 지금 쫒기고 있는데 어떻게하면 좋겠나?라고하자 거북과 물고기가 다리를만들어주었다. 주몽은 무사히졸본에 도착한다 그는소서노와 결혼을 하고 고구려를 세운다. 주몽이 왕이 된 후 주몽의 첫째아들인 유리왕자가 증표를 가지고 찾아온다. 주몽은 유리를 왕위에 올린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다른 땅에 나라를 세운다.

서기전 37년 고구려를 건국

서기전 36년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음 서기전 33년 행인국(荇人國) 정복 서기전 28년 북옥저를 멸망시킴

5. 백제 온조(溫祚)—비류(沸流)—구태(仇台)의 건국 설화

백제의 건국설화는 3가지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3가지 이야기 모두 신비스럽거나 괴상한 부분이 거의 없고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어, 고구려·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오히려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하여 2개의 설화가 전한다. 제1대 온조왕(溫祚王)을 주인공으로 건국과정을 설명한 온조설화는 본문에 실린 반면 비류(沸流)를 주인공으로 삼은 비류설화는 작은 글씨로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온조설화에는 위례성의 백제가 미추홀의 비류집단을 병합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온조계의 성읍국가가 주체가 되어 비류계 집단을 흡수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삼국사기》의 온조설화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생각하건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나중에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사기》의 비류설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는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 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았다. 나중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고 불렀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소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다지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히 두텁게 총애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하였다.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邦業)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낫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國都)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온조설화에서는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라고 하였다.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왕이 된 유리와 남쪽으로 이주해 백제를 세운 온조는 배다른 형제라는 관점이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파생한 나라로서 지배세력의 혈통과 문화기반이 같다는 생각을 반영한

설화인 셈이다. 그런데 비류설화에서는 주몽이 단순히 비류 형제를 예뻐해 준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는다. 비류 형제의 친아버지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북부여 출신의 졸본사람 우태이다. 백제는 부여에서 파생한 나라로서 고구려와도 혈통과 문화기반이 서로 통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설화인 셈이다.

《수서(隋書)》《북사(北史)》의 구태설화

한편,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북사(北史)》 등에는 전혀 다른 관점의 백제 건국설화가 전한다. 《수서》 백제전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백제의 선조는 고려국(高麗國)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시녀 한 명이 갑자기 임신하여 왕이 죽이려하자 시녀가 \"마치 달걀처럼 생긴 물건이 내게 와서 감응하더니 임신했다\"고 말하였다. 왕이 풀어주었더니 나중에 드디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자 신기하다고 생각해 기르라고 명령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매 고려 왕이 미워하자, 동명은 두려워하더니 도망해 엄수(淹水)에 이르렀는데, 부여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어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는데,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시집보냈으며, 점차 번성하더니 동이(東夷)의 강한 나라가 되었다. 처음에 백 집[家]이 바다를 건넜다 해서 백제라고 불렀으며, 10여 대를 지나도록 대대로 중국에 신하로 지냈는데, 예전 역사책에 상세히 실려 있다.

구태설화도 역시 백제를 고구려에서 파생한 나라로 설명하고 있다. 설화 속의 구태(仇台)가 공손도(公孫度; ?∼204)의 딸과 혼인했다는 대목에 주목해 이름이 비슷한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234∼286)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6.삼한의 건국신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으로 이루어진 삼한()은 나라를 수십 개 세웠다지만 모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정복국가로서 나설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다스리는 사람이 도읍에서 일반 백성과 섞여 살고, 지배층을 갈라놓는 격식도 뚜렷하게 마련되지 않았다.

만한에 관한 기사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다.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천군()이라고 했다. 소도()라고 하는 별도의 장소를 정해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다가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겼다. 나라 무당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지배자가 있어서 굿을 주관했지만 굿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에 건국서사시가 포함되는 단계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7. 신라 박혁거세(樸赫居世)의 건국신화

본래 신라가 자리한 서라벌 지역에는 여섯 개의 촌이 있어 육부촌이라 불렸다. 각 촌에는 촌장이 있어 대소사를 관장하였고 6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의가 있어 만장일치제로 6촌 전체의 문제를 결정하였다. 기원전 69년의 화백회의에서 6촌에는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법도를 모르니 임금을 추대하고 도읍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와 이에 6촌장들이 산에 올라 서라벌 땅을 굽어보니 남산 기슭의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어 모두 그곳으로 갔다. 우물가에는 흰말이 있었는데 6촌장들이

나타나자 말은 하늘로 오르고 우물가에는 큰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알에서 건장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뭇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었으며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6촌장들은 아이의 이름을 박혁거세라 칭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은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를 거서간으로 칭했다.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후 어느 날, 샤량리의 알영 우물가에서 계룡이 나타나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여자아이는 얼굴이 아름답고 피부가 고왔지만, 입술에 닭의 부리가 달려있어 보기 흉했다. 사람들이 여자아이를 북쪽 시냇가로 데려가 씻기니 부리가 떨어지고 매우 고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아이가 자라 13세가 되어 왕후로 추대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알영이다. 사량리의 알영 우물가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는 같으며, 나라 사람들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성인\"이라고 부르며 크게 좋아하였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의 경순왕조에 따르면 옛날 중국에서 마한으로 피난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박혁거세의 선조라고 한다.

7. 가야 김수로(金首露)의 건국신화

가야(伽倻) 또는 가락(駕洛)의 건국신화는 두 가지로 전한다.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 대목에서 최치원(崔致遠)이 쓴 이정(利貞)이라는 승려의 인용해서 말한 것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夷毗訶)에서 응감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青裔)를 낳았다고 했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金首露)의 별칭이라고 했다.

<삼국유사> 가야 대목에서는, 하늘에서 자주색 끈이 한 가닥 내려와 둥근 알 여섯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알에서 깨어난 아이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에서도 각기 다섯 가야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했다. 그것은 건국시조가 하늘과 바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여섯 가야의 시조 가운데 수로왕의 내력만 자세하게 말한 것이, <삼국유사> 다른 곳에 수록된 별도의 기록 <가락국기>(駕洛國記)이다.

두 가지 신화는 선후를 가릴 수 있다. 정견모주가 등장하는 쪽이 먼저 있다가, 혈통 계승이 모계에서 부계로 넘어오면서 건국시조를 하늘과 바로 연결시켰을 것이다. 고유어 이름 뇌질청예가 한자를 쓰는 수로왕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야의 유래를 함께 말하다가 자기네 경우만 독립시켰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구간이 하늘에서 금합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맞이해, 그 속에 들어 있는 알에서 깨어난 아니 수로를 임금으로 삼았다. 수로는 그 뒤에 침입자 탈해의 도전을 물리치고, 배를 타고 멀리서 찾아온 허황옥(許黃玉)을 맞이해 배필로 삼았다. 혁거세의 경우와 견주어보면, 알이 금합과 상통한다. 침입자가 탈해여서 신라건국신화와 이어진다. 배필 맞이는 다음에 살필 탐라국 건국신화와 비슷한다.

8. 궁예(弓裔)의 후고구려 신화

성은 '김'씨로,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추정되며,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왕권권력 다툼에 의해 궁에서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때, 궁예를 죽이려고 자객이 침입을 했고, 이를 구하려고 윗층에서 궁예를 던졌는데, 이를 밑에서 받던 유모의 실수로 눈이 찔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궁에서 쫒겨난 궁예는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

세월이 흘러 신라의 힘이 쇠약해지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궁예는 절에서 나와 잠깐 동안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다시 북원에서 세력을 떨치던 양길의 부하가 된다.

그 후, 궁예는 양길의 부하들을 이끌고 강원도,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장악하게 되고, 이때 그를 따르던 부하들과 함께 양길에게서 독립을 하게 된다. 또한

송악(개성)일대 및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왕건 집안의 협조로 그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되고, 마침내 양길을 공격하여 그를 제거한다.

수도를 송악으로 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칭하고, 그는 스스로 왕이 된다. 얼마 후, 다시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이라고 고치고 왕건을 시켜 해군을 이끌고 나주지역을 정벌하게 한다.

승승장구함에 따라 궁예의 폭정이 심해져가고 그 자신은 미륵보살이라고 하여 대신들과 그의 부인 및 자식들까지 죽이게 된다. 이에 민심이 궁예에게서 떠나자, 왕건은 부하장수들(신숭겸, 복지겸...)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

9. 견휜의 후백제 신화

전주 견씨의 시조이며, 본성은 '이'씨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상주지역의 호족인 아자개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견훤은 어릴적 아버지인 아자개와 사이가 안좋아서 집을 떠난다.

그 후, 신라의 군관이 되어 해적들이 날뛰던 나주지역의 총관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복무하던 중, 신라의 힘이 약화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견훤은 자신의 추종세력 및 나주지역의 호족들과 연합하여 독립을 하게 된다.

무진주(광주)와 완산주(전주)를 점령한 견훤은 수도를 완산주로 하고 국호를 후백제라고 칭하고 스스로 왕이 된다. 이때 경기도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던 후고구려와 그 후신인 고려를 상대로 여러차례 전쟁을 벌이며, 한때 나주지역을 왕건에게 빼앗기지만 전반적으로 우세를 점하게 되다.

신라를 상대로 대야성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신라의 경애왕을 경주 포석정에서 살해를 한다.

하지만, 그 상승세도 점차 꺾이게 되어, 신라가 고려에 귀순하고, 후백제 또한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고려로 귀순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런 일말의 사건 후, 고려 왕건의 공격에 결국 후백제는 멸망하고, 신검은 왕건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하지만 왕건은 신검을 포로가 아닌 국빈으로 예우하며, 식읍까지 주게 된다.

이에 견훤은 왕건이 신검을 우대하는 것을 참다 못해 결국 평소에 앓아오던 등창이 터져 죽게 된다.

10. 왕건의 고려 신화

금성태수였던 왕융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후고구려의 장수가 되어 충주지역 및 해군을 끌고 나주지역까지 점령하는 등 뛰어난 활약으로 인해 신하로써 최고 관직인 시중이 된다.

그 후, 태봉의 궁예가 민심을 잃고 폭정을 일삼자, 신숭겸과 복지겸 등 휘하장수들의 추대로 반정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고 후고구려의 왕이 된다. 왕건은 곧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국호를 고려라고 고친다. 뛰어난 외교술 및 군략을 통해 서경(평양) 및 그 일대를 점령하는가 하면, 신라를 평화적으로 흡수하고 후백제를 공략하여 후삼국을 통일한다.

통일 후, 북진정책 및 융화정책, 숭불정책을 펴며 통일왕국의 기반을 닦는다. 죽기전 훈요10조를 만들어 후대 왕에게 지침이 되도록 한다.

11. 탐라국 건국신화

제주도에서 탐라라는 나라를 이룩하는 사업이 진행된 내력을 <고려사>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건국시조가 셋이나 되어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라고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땅에서 솟았다고 한 점이 특이하다. 세 사람이 솟아났다는 곳은 삼성혈이라고 한다. 그 말을 따서 <삼성신화>라고 이름 지은 신화가 탐라국 건국신화이다.

세 사람이 사냥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나무로 만든 함이 바다로 떠왔다. 함 속에는 처녀 셋과 망아지, 송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처녀 셋은 일본국 공주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세 사람의 아내가 되기 위해 그곳에 왔다고 말했다. 세 부부가 땅을 나누어 가지고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면서 후손을 퍼뜨렸다고 한다.

원주민과 이주민이 결합해 새로운 생업을 개척한 것이 탐라국 건국의 기초이다. 서사무가에서 자료를 보탤 수 있다. 서사무가에는 신앙서사시,창세서사시,

영웅서사시라고 할 것이 있다. 앞의 둘은 원시문학이고, 뒤의 것은 고대문학이다. 제주도 역사가 원시시대를 벗어나 고대에 들어서서 탐라국을 건국할 시기에 영웅서사시를 창조했다고 생각된다. 위에 서 든 <삼성신화>를 구전되고 있는 영웅서사시와 비교해보면 그런 추정이 더욱 분명해진다.

영웅서사시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는 <김녕괴내깃당본풀이>나

<송당본향본풀이>같은 당본풀이에는 <삼성신화>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그 전후에 다른 내용이 더 있다. 여성 시조도 남성 시조처럼 땅에서 솟아났으며, 자기 스스로 판단해 제주도에 와서 배필을 구했다고 했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버림받아 무쇠상자에 실려 바다를 표류하게 되었다. 그 시련을 이겨내고 커다란 전공을 세우고 귀환해 도망친 아버지 대신 통치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두 자료를 비교해보면, 구전이 고형이고 완형이며, 기록은 축약이고 개작이다. 일본국 공주이고, 아버지의 분부가 있어 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고대인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후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게 고친 내용일 것이다. 후반부는 너무 허황되다고 여겨 기록에 올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부모의 만남에 이어서 자식의 출생을 말하는 것은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계

건국신화에서도 확인되는 공통된 설정이다. 버림받았다가 살아나 통치자가 된 자식에 서국 언왕, 고구려 주명, 신라 탈해도 있다. 자식을 버릴 때 상자에 넣어 바다에 떠내려 보낸 것은 탈해의 경우와 일치한다. 주몽이나 탈해는멀리 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괴내깃또는 자기 고장으로 돌아와 자기를 버린 아버지에게 도전했다. 그런 내용을 갖춘 <김녕괴내깃당본풀이>나 <송당본향당본풀이>는 고대국가의 창업주를 기리는 영웅서사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국내외의 어느 자료보다도 더 잘 보여주고

있다. 탐라국의 중심지가 <삼성신화>의 현장이 되자, 서북쪽 변두리 마을에서 그곳의 당본풀이에서 후반부까지 갖추어져 있는 건국서사시를 전승했다. 탐라국을 세 집단이 함께 이루었던 사실은 전승에서 제외해 삼성 존중과 결별하고, 삼성 가운데 누가 으뜸인가 하는 시비에서 벗어났다. 그 대신 아버지의 횡포에 대한 아들의 항거를 되새기는 데 특히 힘썼다.

서로 다른 많은 문명의 신화들이 서로 공통점을 가지 듯 제주도의 탐라국

건국신화도 육지와 떨어져있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육지의 신화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시조가 땅에서 솟아났다는 점인데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다 보니 땅이 더 희귀성을 가지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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